[오병익칼럼] 오병익 전 충청북도단재교육연수원장·아동문학가

지난 세밑, 그러잖아도 혹한이 계속 돼 날씨의 반전을 기대하던 중 우리나라 대표 문화유산인 경복궁 영추문과 국립고궁박물관 주변 쪽문에 스프레이 대형 낙서(落書)와 또 다른 모방 범죄가 덜미를 잡혔다. 아마 그들에겐 ‘글씨나 그림 등을 장난 혹은 심심풀이로 아무데나 함부로 씀’이란 낙서의 사전적 풀이를 즐거울 락(樂)자로 오인했나보다. 그렇게 한 뒤 자신의 블로그에 ‘예술일 뿐, 다들 너무 심각하게 상황을 보는 것 같은데’ 그리고 인증샷까지 올렸다니 이슈를 만들려는 심각한 혐오문화 패닉에 빠진 듯 하다.

하지만 당국은 차분한 진단과 대책보다 화학 약품 처리, 레이저 세척 등 다양한 방법의 초고속 흔적 지우기에 너무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냥 몇 달 동안 내버려 둬 봤으면 어땠을까‘ 나름 찌질하게 멍 때렸다.

◇인생의 대박?

필자가 현직시절, 출근 후 교장실에 들어 외투를 벗기 전 행정실장 목소리는 다급했다. “큰 일 났습니다. 후관 쪽 벽면에 대문짝만한 낙서를 해놨습니다.” “뭐라고요?” 부랴부랴 교감·교무선생님과 현장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누굴 꼲았는지 몰라도 3색 스프레이로 굵직하게 ‘개 XX’라고 휘갈겼다. 장난·분노· 혐오, 여러 유형을 생각했다. ‘복구를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지만 내 입장은 ‘일정 기간 존치’로 굳혔다. “불순한 의도가 아닐 터, 금세 생채기를 덮으면 반복할 소지가 다분하다.

또 하나, 낙서의 현장 교육으로 최적 콘텐츠였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신경이 씌어 걸쩍지근했지만 정확히 45일을 내버려뒀다 페인트를 발랐다. 제2, 제3의 행위는 일체 없었다. 누액처럼 흘러내린 세 글자 ‘개 새X’와 연일 마주하며 확인했을 본인의 시선이야 오죽 불편했을까. 나름 그는 자존심 손상에 크게 후회했으리라. 2년 뒤 나는 직속기관장 자리로 정기 인사 발령됐다. 송별연 석상에서 사회자 멘트가 더 웃겼다. “교장선생님 영전은 순도 100% 낙서 덕분입니다.” 뒤질세라 필자 역시 맞장구를 쳤다. “인생의 대박, 저를 두고 한 말 같습니다.”

◇휴먼 에너지

캐릭터가 분명한 ‘용(龍)’을 달굴 문자가 카톡의 낙서(樂書)로 살아나는 2024년이다. 새해 일출, 잔뜩 올린 먹거리 앞에서 찍은 사진을 올린 페북과도 만난다. 늘그막 운동에 바짝 긴장하는 친구, 유독 푸르고 큰 용의 이미지까지 덕담이 얹혔다. 생면부지 인사장은 뭘까. 본말이 전도됐건 말건 금배지를 향한 예비주자들, 개인정보보호법을 뚫은 폰 번호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마구잡이 홍보다. 한데 어쩌나. 지역구조차 다른 걸 모르고 줄사탕 카톡을 쏴댄다. 오로지 100일 남짓 총선에 빠져 있다.

혹자는 낙서를 표현의 자유 또는 예술로 치켜세운다. 시리고 아릴수록 불꽃만큼 덥힐 수 있다는 믿음과 멘탈의 전설 속 용(龍: 8척 이상 신령한 동물)과 소통할 새해, 휴먼 에너지(Human energy)를 담은 고운 낙서(樂書)라면 몰라도….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