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 수필가

 

[월요일아침에] 김영애 수필가

평일 오후 예산으로 향했다. 지난번 일정에 들려보지 못하고 왔던 수덕사를 내가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을 눈치라도 채셨나보다.

천주교 신자인 나는 요즘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서 산사순례를 자주 하게 되었다. 산사의 고즈넉함에 취해서 절 마당을 서성거린다. 법당에서 두 손을 모으고 몸을 낮춰서 예의를 갖추고 돌아오는 길이면 산 아래 세상에서 지은 죄 하나 내려놓고 오는 듯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사계절 산사의 풍광은 다 아름답지만 나는 가을이 온통 물든 산사를 좋아하고 자주 찾게 된다.

덕숭산 자락의 수덕사. 일주문을 지나서 대웅전으로 향하는 가파르고 높은 계단을 오른다. 쉽고 편한 길도 있지만 오늘 이 시간만큼은 수행자의 마음으로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고 싶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른 그 끝에 대웅전이 모습을 나타냈다. 사찰의 규모와 넓은 절 마당에 비해 대웅전은 커 보이지가 않았다. 소박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화려하게 단청을 하지 않은 대웅전을 마주한다. 단정하고 정숙한 사대부 집안 여인의 모습이다. 분칠을 하지 않아도 고운 여인의 모습이다. 단아하고 기품이 넘친다. 절제된 아름다움에서 느껴지는 위엄이 나의 마음을 겸허하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민다.

국보인 대웅전 법당에 들어서 향을 올리고 예를 갖췄다. 낮을 대로 낮아지고 작아질 대로 작아진다. 나라의 보물인 국보 수덕사 대웅전 법당 안에서 은밀하게 또 하나의 보물을 찾고 계신 선생님의 모습을 보았다. 좌불 하신 부처님 뒤편에 잘 보관되어 있는 수덕사의 보물 대형 괘불탱화를 발견하시고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아는 만큼만 보고 듣고 느끼며 산다는 생각을 경험한 순간이었다. 괘불탱화는 중요한 야외법회 때에만 밖에 내걸리고 세상의 빛을 보는 귀한 보물이다. 천년의 보물 앞에서 심연의 파문이 잠잠해 지질 않는다.

일주문을 조금 지나서 단출한 초가집이 보인다. 수덕여관이다. 수덕 여관을 들어서면서 두 여인이 떠오른다. 한분은 “청춘을 불사르고”의 저자 김일엽 스님이고 또 한분은 신여성 여류화가 나혜석이다.

당대의 유명한 두 여성 페미니스트 김일엽 스님과 나혜석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일엽 스님은 33세에 꽃답던 청춘과 사랑을 먼지처럼 털어버리고 견성암에서 수계를 받는다. 여류문인 이었지만 속세와의 인연을 질타하는 만공선사의 뜻을 따라서 붓마저도 꺾었다. 일엽스님의 친구였던 나혜석은 사랑에 상처받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상흔을 치유하기 위해서 머무르던 곳이 수덕여관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여인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로라 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었다던 수덕여관은 주인도 객도 떠나가고 초라한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했다. 마음이 쓸쓸해진다. 수덕여관 바로 옆에 선미술관에서 이응로 화백의 그림을 보면서야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았다. 절 문을 나서면서 나에게 화두를 던진다. 일엽스님은 불제자로 받아들이고 나혜석에겐 자격이 안 된다고 했던 득도한 만공선사의 잣대는 무엇이었을까? 단풍이 정염처럼 불타는 가을에 다시 수덕사를 찾으면 그 답을 들을 수 있을까! 가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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