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세대·직업 불문하고 모든 민족 참여
식민지서 일어난 첫 대규모 독립운동
臨政 수립 계기… '무장투쟁' 이끌어

[충청일보 이정규기자]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이기도 하다.

전국 각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의 분수령이 된 최대규모의 항일운동이었다. 

세대와 직업을 불문하고 모든 민족이 참여한 3.1운동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독립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3.1운동은

1918년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가 열렸고 미 윌슨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했다.

이를 계기로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독립 선언을 외쳤다.

2·8 독립 선언 후 독립운동가들은 종교계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33인의 민족 대표를 모았다.

33인의 민족 대표들은 전국 주요 도시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하기로 했다.

고종 황제가 일본인에 의해 살해됐다는 의문이 제기되면서 3.1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1919년 3월 3일 고종 장례식 이틀 전 민족적인 운동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민족 대표 33인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3월 1일 서울 인사동 태화관 앞에서 독립 선언을 낭독했다.

같은 시각 서울 종로 탑골 공원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독립 선언식을 올리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3.1 운동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퍼져 5월까지 이어졌다.

처음에는 학생과 지식인, 종교인들이 주축이 됐지만 점차 농민이나 노동자들도 참여하는 거대한 운동으로 확산됐다.

3.1 운동은 만주, 연해주, 미국,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의 만세 시위로 퍼졌다.

집회 참여자 106만명, 구속자 4만7000명, 사망자 7509명 등 민족적인 대단위 참여와 함께 희생자도 많았던 운동이다.

◇3.1운동의 의의

3·1운동은 민족의 통합, 일제 통치방식의 변화, 임시정부의 수립, 독립운동 방식의 변경 등 실질적이고 체계적이며, 구체성 있는 독립운동을 하는 계기가 됐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일부 식자층만이 참여한 운동이 아니다.

학생, 농민, 상인, 노동자, 종교인 등 직업과 신분을 불문하고 다양한 계층의 국민들이 함께 한 거대한 민족운동이다.

3·1운동을 통해 대외적으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줬다.

3·1운동으로 인해 독립 운동이 좀더 확산되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하게 됐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도를 넘어 3·1운동을 할 수밖에 없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

일제는 3·1운동에 크게 놀랐고 기존의 무단 통치 방식에서 문화 통치로 변경하게 됐다.

3·1운동은 전세계에도 반향을 일으켰다. 인도 간디는 비폭력·불순종 운동을, 중국에서는 5.4운동이 일어났고, 터키의 민족운동 등 3·1운동이 미친 영향은 상당했다.

하지만 3·1운동이 지역적으로 분산해 일어나면서 좀더 효율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로인해 독립운동을 주도할 수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같은 해 상하이에서 수립됐다. 3·1운동은 임시정부의 수립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1운동은 또 당시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부 지도자들이 미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천명명으로 국제적인 움직임이 있자 비폭력을 통한 평화적 독립 방식을 고집했다.

그러나  3·1운동을 경험하며 자주적이고 민족의 주체적인 운동만이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후 일본에 대한 무장투쟁 독립 운동이 체계를 갖추게 됐다.

3·1운동은 이처럼 다양한 측면에서 민족의 독립을 실제 이끌게 한 역사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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