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은정 ▨ 프로필 △1986년생 △계명대 일본어문학과 졸업 △한국방송통신대 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졸업.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소설부문 오은정] 습관처럼 세정제를 발랐고 스프레이용 세정제를 뿌렸다. 원래는 수업 시작 전에만 그랬지만 두 번의 겨울을 보내면서 나는 아이들이 있든 없든 수시로 바르고 뿌리기를 반복했다. 손을 자주 씻는 것은, 당연히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의 옷자락이나 살에 손이 닿는 일이 생기면 수업이 끝날 때까지 절대 손을 상체 위로 올리지 않았다. 자발적인 의지가 거의 소멸된 상태에서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의 무례함이나 무식함이야 익숙해졌어도 이들에게서 풍기는 텁텁하고 짠내 나는 냄새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이 볼 옆에 바짝 다가와 친한 척 말을 걸어올 때면 나는 표정관리가 안 되었다. 세정제라도 바르고 뿌리지 않으면 문자 그대로 미쳐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서랍 안엔 세정제와 공기 정화 스프레이, 물티슈, 알코올 솜, 비누 대신 사용하는 폼 클렌저 샘플들이 항상 떨어지지 않고 구비되어 있었다. 이렇게까지만 말하면 나란 사람이 병적일 정도로 결벽증이 있는 괴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정신적으로 어디 결함이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이 모든 것들이 내 나름대로 균형을 잡기 위함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무질서와 불쾌의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더 예민하고 성숙해지길 갈망했다. 무질서가 더 혼란해지고 불쾌가 더 깊어질수록 누구보다 지적으로 고결하고 우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5년 전 가을, 발단은 영화 『컨테이젼』 이었다. 오랜만에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신작을 본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지만 바이러스의 전염 과정을 묵직하게 쫓아가는 카메라워킹이 그다지 대단하거나 특별하진 않네 라고 생각했었다.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망자들 가운데 최초 발생경로를 찾는 과정이 역순이라는 것이 조금 흥미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판에 가서 완전히 뜨악해버렸다.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유래 없는 재난 상황의 시발점이 고작 악수였다니. 입사 2달 만에 권고사직을 받았을 때보다 더 큰 멘붕이 올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그 희생자들의 기록을 집요하게 쫓았던 전반부에 비해 영화의 엔딩은 허무할 정도로 심플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박쥐의 병균은 무차별적으로 돼지의 입속으로 들어갔고 운명처럼 그 돼지가 요리사의 도마 위에 올라간 건 불과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치아를 환히 드러내고 요리사의 손을 덥석 붙잡는 기네스 팰트로의 해맑은 얼굴이 그야말로 미치게 했다. 섬뜩하고 서늘한 웃음이었다. 나는 삐걱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극장을 빠져나왔다. 하늘은 낮게 깔려 있었고 보이지 않는 빗방울이 아스팔트를 적시고 있었다.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졌던 첫 직장에서 잘린 뒤 3개월 정도 방황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방의 문화교양지에 면접을 본 지 일주일이 지났었다. 다시는 글 쓰는 일 따위 하지 않으리라 치를 떨었지만 인크루트를 검색하는 눈과 손은 또 거기뿐이었다. 이 계통의 일을 계속 해야 하나, 이제 겨우 한 번이었는데, 아니 아직 할 수 없어, 이 사이를 계속 오가다가 결국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방까지 내려가 면접을 보고 말았다. 어설픈 사명감과 희망으로 다시 글을 쓰기로 결심한 그곳에서 3개월 만에 처음 본 영화의 엔딩은 생각보다 임팩트가 셌다. 곱씹을수록 기묘하고 서늘한, 기분 나쁜 엔딩이었다.  

"쌤, 우리 폰은 다 거뒀으면서 쌤은 왜 폰 만져요?"

"이게 또 맞먹으려고 한다. 헛소리 말고 워크북이나 가져 와."

"원장 쌤은 폰 만질 일 있으면 우리한테 미리 얘기하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쩌라고. 국민안전처에서 문자 왔잖아 지금."

"진짜요? 또 지진이에요?"

"그래. 규모 3.3이네 이번엔."

"우리 진짜 죽는 거 아니에요? 경주는 우리랑 가깝잖아요."

"안 죽어.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는 줄 아냐. 문제나 풀어."

나는 이미 30분 전에 날아온 재난 문자를 핑계 삼아 태연히 문자를 확인했다.  

Blow blow away blow anywhere... freely and bravely

한글이 아닌 영어, 그것도 밑도 끝도 없는 내용으로 봐서 J가 보낸 것이 분명했다. 너무 오랜만이긴 했지만 J임이 틀림없었다. 완벽한 절도 구도 아닌 애매모호하게 끝나는 영어 문장과 발신자 제한 번호는 일종의 J의 표식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 J는 허세인지 보여주기 식의 진심인지 분간할 수 없는 말들을 영어로 보내곤 했다. 정확한 시점은 모르지만 언제부턴가 고집스레 영어로 문자를 보냈다. 휴거라고 불리는 휴먼시아 아파트 상가의 영어교습소 선생이라는, 가족과 몇 안 되는 지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나의 현재 타이틀을 J가 어찌어찌해서 알아내 그걸 조롱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문자를 보내나 하는 생각에 야밤에 벌떡 일어나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로그인한 적도 있었다. 근본적인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시간이나 환경에 따라 어느 정도 성향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J의 문자는 감동적일 때가 많았다. 지방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나 썰렁한 거실에 앉아 따가운 눈꺼풀을 끔뻑이며 치맥을 먹고 있을 때는 특히 더 그랬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냄새나는 아이들로 바글바글한 학원이라는 특수한 장소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런 감정에 쉬이 함몰되지 않는 나 자신을 발견할 뿐이었다. 액정에 번쩍이며 뜬, 거의 2년 만에 날아온 J의 문자는 마치 동물원에 있어야 할 커다란 기린이 눈앞에 우뚝 서 있는 것 같이 이상한 기분을 들게 했다. 

'뼈마디가 튕기며 심장이 터진다. 그렇게 순식간에 진멸할 지도 모른다.'

J와는 그해 봄부터 가을까지 만났으니 딱 6개월을 만났다. 취업을 준비하고 첫 직장을 구한 짧고 가혹했던 그 시기에 J의 존재는 내게 가장 유익하고 가치로운 어떤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관심하게 여기는 대상에게 감동과 충격을 느끼는 지점이 서로 비슷했고 영화 취향도 비슷했다. 굴욕당하고 비웃음을 사는 경우가 있더라도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고수할 줄 아는 J와 봄부터 가을까지, 거의 매일 만나면서 그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판에 이런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런 뜬금없고 심오한 말이 헤어져야 하는 이유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평소랑 달리 깊고 우울해 보였던 눈망울에서 쏟아지는 말을 들으며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어째서 세상이 곧 진멸하는 지경이 되는 건지, 어떤 과학적인 이유와 근거에서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거냐는 나의 물음에 J는 꽤나 진지한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뼈마디가 튕기고 심장이 터지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그 최악의 상황이란 것 때문에 우리가 헤어져야 되냐고, 단지 그것 때문이냐고 나는 완전히 그로기상태로 흥분해 물었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허무하리만큼 쓸쓸하고 단호했다. 내 앞에 앉아있는 이가 내가 알고 있는 J가 맞는지 그를 둘러싼 공기와 시간과 배경 하나하나가 낯설게 느껴졌다. 청운의 꿈을 품었던 첫 직장처럼 완벽한 인연이라 믿었던 사람도 허무하게 사라지기 일보직전이라는 것이 단순명료하게 인지되었다. 어떤 경우에도 단단히 엉켜 붙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마치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맥없이 풀리고 흩어지고 사라지고 있었다. 깊지 못한 나의 상식선과 인력으론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일이란 생각에 나는 지금 돌이켜봐도 꽤나 담담하게 티백이 걸린 머그컵을 내려두고 카페를 나왔다. 짤랑. 경쾌하면서도 무거운 소리를 내는 카페 문이 닫히기 전에 다시 J가 있는 자리로 돌아가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나는 속을 꾹 누르고 앞만 보며 걸어갔다. 끝으로 치닫는 시간 속에서 침묵하며 걷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매너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허상적이고 서늘한 말들을 다시 한 번 들었다가는 그때는 정말 멘탈이든 메테리얼이든 머릿속에 남아있는 게 한 톨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온 몸이 텅 빈 것 같은 스산함으론 도저히 다리에 힘을 주고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TV 속 드라마의 여주인공에 빙의해 나에게 남아있는 눈물 따윈 없다는 쿨함과 박력으로 폰을 내려두었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명확하게 해독할 수 없는 글자 한자 한자에는 이유막론하고 나를 향한 J의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움이 담겨있다고 믿었지만 실체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오랫동안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슴 아래 무언가 뭉클하게 올라오는 느낌이 있었지만 멀고 희미했다. J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디를 그렇게 자유롭게 대범하게 날아가고 싶은 걸까. 지진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였을 때 나를 잠시라도 생각하긴 했을까.    

"쌤, 진짜 지난번처럼 지진 크게 일어나면 어떡해요? 여기 건물 완전 구리잖아요."

"맞아요. 공부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데."

"XX중학교는 층마다 벽에 금이 다 갔대요. 페북에 완전 쫙 퍼졌어요."  

맞아요 쌤.

공부 안 할래요.

쌤 폰 만지게 해줘요. 잠 와요.

사탕 줘요 쌤. 아니 떡볶이 사줘요. 

삼일 째 같은 페이지를 붙들고 있는 P를 시작으로 지금이 기회라고 여긴 나머지 아이들의 입도 봇물 터지듯 우르르 열렸다. 닦지 않은 철판에서 나는 기름때 같은 악취와 시큼 짭짤한 땀내와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가 한데 섞여 공기 중에 확 퍼졌다. 순식간에 코를 자극하는 냄새 속에 J의 문자도, 아주 조금 울컥하며 샘솟았던 감정들도 증발했다. 나는 서랍에서 손 세정제를 꺼내며 교실 바닥을 내려다봤다. 책상 다리를 받치고 있는 장판 주변의 바닥이 일정 간격으로 붕 떴다가 어느 한 부분이 눈에 띄게 쑥 꺼져 있었다. 어떻게든 한 건 잡아내려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교실이 시끄럽게 달구어지면 나는 냄새나는 아이들의 입김을 피해 교실 바닥, 시커먼 장판 아래로 사라지고 싶었다. 왜 유독 이 아이들에게선 냄새가 나는 걸까. 아이들 말대로 휴먼시아 거지라서 그런 걸까 하는 마음에 가시처럼 걸렸던 애당초 생각은 대학 시절부터 기를 쓰며 갈고 닦은 영화적 글쓰기의 전문성이나 타협 없는 예술적인 열정 같은것과 함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추잡한 파리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흐물흐물하면서 동시에 딱딱하게 변해버린 어떤 이상한 물성, 이를테면 까맣게 눌러 붙은 껌 자국이나 낙서 자국의 일부가 되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만 반복할 뿐이었다.  

수업 시작 내내 샤프 뒷꼭지 부분으로 지우개를 쑤셔대던 H가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벌리고 재채기를 했다. 귀청을 때리는 소리에 신경이 재깍 곤두섰다. 나는 얼마나 세게 힘을 주어야 H처럼 수많은 침방울을 분사된 물줄기처럼 뿜어낼 수 있을까 생각하며 서랍을 열었다. 각종 세정제들을 밀쳐내며 30센티 투명 자를 찾고 있는데 H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5분 전에 물을 마시고 들어왔으니 이번엔 화장실을 갈 타이밍이었다. ADHD 때문에 작년까지 약을 먹었다던 녀석은 수업 시간 50분을 단 한 번도 지긋이 앉아 버틴 적이 없었다. H가 교실 밖으로 나가자 어김없이 P의 목청이 한톤 더 커졌다. 나는 아이들의 소음과 불쾌한 냄새가 더 퍼지기 전에 있는 책상모서리에 대고 힘껏 자를 내려쳤다. 그리고 낙서 자국으로 귀퉁이가 반 이상 날아간 P의 프린트물과 공책을 북북 찢어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는 아이들을 상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종의 감화와 훈계는 이 정도가 다였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고압적인 행동이 훨씬 더 효과가 있었다는 걸 터득하게 된 뒤부터 나는 야비한 표정을 숨기고 자리로 돌아와 풀이 죽어 시무룩한 얼굴로 의자를 당겨 앉는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한 감상하곤 했다.

다들 주목.

복도에 조용히 한 줄씩 서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세요.

나는 바짝 쫀 상태로 교실 문을 보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교실 문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나무토막, 움푹 파인 손잡이 부분의 아들아들하게 닳은 한 표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호들갑을 떨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의 뒷모습 보다 모든 층마다 똑같이 있는 똑같은 모양의 교실 문을 쳐다보고 있는 게 초조함과 긴장을 누르는데 도움 되었기 때문이다. 차갑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주사바늘이 내 살과 핏줄을 뚫으며 덮쳐올 것을 생각하니 아무런 감각도 감정도 일지 않는 무생물이 부러웠고 나무토막이 되고 싶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인간이라는 게, 육체와 피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창백한 손으로 벽을 집고 서서 복도에 불어오는 바람 냄새를 맡았다. 투명한 니스가 칠해진 짙은 고목 색의 나무껍질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촘촘히 결을 이루고 있는 엷은 줄기들을 지나 그보다 더 작은 세포들을 무수히 통과해 핵의 핵까지 도달하면 무엇이 있을까.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처럼 적막하고 깜깜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없다면 지옥은 아닐까. 기다림의 초조함도 생생할 아픔도 시간 속에 무수히 반복될 고통도 없을 텐데 그런 곳이 지옥일 수 있을까. 줄이 짧아지고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문 속으로 나무토막 안으로 점프하듯 뛰어 들어가고 싶었다.

어둠이 사라지고 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 나는 버스 첫 차에 올랐다. 차창 밖에는 또 다른 하루를 위해 그 주변을 떠돌기 시작하는 생명의 포말들이 진동하고 있었다.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시간. 승자의 뽐냄도 패자의 억울함도 청년의 미숙함도 보이지 않는 시간이었으므로 누군가는 이 시간을 두고 지혜의 시간이라 했다. 그런 시간에 나는 최종 편집 수정을 편집장에게 보고하고 퇴근했다. 팔꿈치 아래 전완근이 당겼고 눈이 시렸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더운 물을 콸콸 틀어놓고 이를 닦고 손과 머리를 깨끗하게 씻으며 오랫동안 공들여 샤워 하고 싶었다. 꽉 낀 스키니를 벗어두고 헐렁하고 보송한 파자마를 입고 전기장판으로 적당히 달구어진 침대 속으로 서둘러 들어가고 싶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거울을 쳐다보았다. 기쁘다 보람차다 후련하다 피곤하다 이렇다 할 뚜렷한 감정도 감회도 없이 기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 참을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왔다. 채 삭혀지지 않은 묵직하고 홧홧한 어떤 기운이 장을 통하고 위를 거쳐서 식도 쪽으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숨만 쉬어도 고통스럽게 옥죄는 통증을 느끼면서 뜬금없다는 걸 알지만 이대로 침을 뱉어본다면 기분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침을 뱉으면 어떨까. 카악하고 거울에 침을 뱉어보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길거리의 사람들이 이유 없이 무작정 자신을 찌를 것 같았다고 공황장애를 고백한 어느 연예인의 축 처진 볼 살과 눈꼬리가 생각났다. 그 사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거울 속 딱딱하게 굳은 얼굴 옆에는 음식메뉴가 빼곡하게 적힌 분식 전단지와 스티커들이 뜬금없고 무분별한 자태로 붙어져 있었다. 『컨테이젼』 의 마지막 장면, 서늘하고 섬뜩한 웃음이 또 다시 떠올랐다. 영화에 대한 심도 있는 글다운 글을 쓰고 싶었던 글은 조회수를 위한 자극적인 글로 바뀌었고, 이제는 그마저도 아닌 시시콜콜한 영웅담으로 가득 찬 아무도 읽지 않는 인터뷰 글이 되어 있었다. 그토록 원했던 어떤 미학적인 것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고, 걷잡을 수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이었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다름 아닌 불안감과 수치스러움이었다.

어이, 괜찮슴묘?

대학 동기 S에게서 문자가 왔다. 평소엔 잘 쓰지 않는, 내가 좋아하는 예능프로에 출연하는 연예인의 말투를 따라하는 걸로 봐서 내 기분을 달래주려 한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어제, 나는 퇴근길에 S에게 전활 걸어 Blow away에 대해 들려주었다. J에 대한 원망인지 미련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말들을, 나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퍼부었다. 실컷 토해내고 나니 후련한 것도 같았지만 밤에는 레돌민을 먹고 자야했다. 그런데 이상한 꿈을 꿔버렸다. 

야, 미리 또 경고하는데 그 새낀 그냥 사이비에 빠진 또라이일 뿐이야. 문자 한통에 미련 갖지 마. 알겠지? 근데 계속 말해봐. 무슨 꿈인데?

파란 꿈이었다. 그냥 매일 보는 옅고 희미한 일상적인 하늘색이 아니라 아주 쨍하게 짙고 선명한, 강도 높은 색깔의 파랑이었다. 그런 색깔은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처음이었다. 나는 꿈속에서 대학생 신분이었고 강의실에서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수업 내용과 관련된 PPT자료였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애니메이션 같은 영상이 플레이되고 있었다.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국가기밀부서 같은 곳에 남들 몰래 사내연애를 하는 주인공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부서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남자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몸 바쳐 하고 있는 일이 알고 보니 일종의 반사회적인 행위였고 최종적으로는 국가 전체의 시스템까지 무너뜨리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모든 정체를 알게 된 남자는 서둘러 여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자신이 알게 된 사실을 말한 뒤 여기를 떠나야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의 손목을 쥐고 일어나기도 전에 사이보그틱한 헬멧과 총기로 무장한 군인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렇게 장면은 급격히 전환되었고 핵폭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엄청난 소음 속에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대로 처참하게 막 내릴 것 같았던 잿빛 영상이 또 한 번 급작스레 바뀌었다. 엄청나게 선명한 새파란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 모든 생물들이 죽은, 시리도록 파란 바다의 정적 속에 여자와 남자는 손바닥이 아닌 손가락 끝을 아슬아슬하게 맞대며 가라앉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화면은 정지되었고 교수는 수업을 마무리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모든 풍경이 바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나무와 광장을 잇는 흐릿한 지평선 너머에 금방이라도 새파란 바다가 파도를 넘실대며 뻗어올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서 실제로 바다를, 넘실대는 파도를 본 게 언제였지 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며 길게 소변을 봤다.

야이 씨, 너는 무슨 꿈을 꿔도 그런 꿈을 ㅋㅋㅋ 이제껏 들은 꿈 중에서 제일 뜬금없으면서도 웅장하다야. 근데 좀 많이 거시기한데... 너 혹시 그 전날 영화 보고 잔 거 아니야?

갑자기 영화는 무슨ㅋ 야 걍 웃지마ㅋㅋㅋ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구만

아니 그게 아니라ㅋㅋ 마지막에 다 전멸해서 뒈지는 게 꼭 에반게리온 같잖아. 너 분명 그거 봤어. 어제 밤에 본 게 아니라도 언젠간 봤을 거야. 옛날에 그거 극장판 개봉했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막 내리기 전에 꼭 봐야 된다고 노래 불렀잖아. 기억 안 나?   

당연히 기억났다. 에반게리온 파(에반게리온 서도 마찬가지였지만)의 마지막 장면은 잊을래야 쉽게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었다. 진보한 기술력이 보여준 죽음 직전의 지구의 생생한 스펙타클함은 숨 막힐 정도였다. 자폭과 관련된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 마지막 시퀸스는 언젠가 권한이 생기고 지면이 주어진다면 제일 먼저 써내려가고 싶었던 주제 중 하나였다. 세계와 종의 운명을 결정할 싸움, 피의 천사와 대결하는 소년의 성장기,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간직한 자들의 애틋한 바람, 그리고 변화를 넘어선 새로운 꿈. 그것은 자폭과 진멸 사이에 존재할 지도 모를, 어쩌면 전혀 다른 의미의 출발일지도 몰랐다. S의 입에서 나온 에반게리온이란 말 한 마디가 한동안 잊고 있던 머릿속의 어떤 존재를 격렬하게 건드렸다. 관자놀이 옆 후두부 뇌 안에서 말랑말랑하게 움직이던 무기체들이 엄청난 움직임으로 속살을 뚫고 나오려는 폭발적인 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야 됐고. 결론은 그냥 개꿈이야. 잊어버려. 맘에 담아 두지 마 그 새끼고 꿈이고. 알겠지?

ㅇㅇ 근데 좀 찜찜한 건 사실인 듯. 2년 만에 받은 문자 때매 꿈이나 꾸고.

ㅋㅋㅋ그냥 너 다시 꼬셔볼라고 작전 짜는 거 아냐? 미끼 한 번 훅 던져본 건데 순진한 니가 그걸 확 물어분거고.ㅋㅋㅋㅋㅋㅋ

야이 씨발 너는 진짜 말을 해도ㅋㅋㅋ 물긴 뭘 물어

여튼 너 괜히 마음 혹 해서 여기저기 수소문해가지고 그 새끼한테 연락하기만 해라. 헤헤 거리면서 연락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면 기도원 같은데 갇혀서 하루죙일 기도하고 절하고 있을 거야ㅋㅋㅋ 몸에 도가니란 도가니는 아주 너덜너덜해져 있을껄ㅋㅋㅋㅋ

미친년 말빨은ㅋㅋㅋ안 그래도 뒤숭숭한 시국에ㅋㅋㅋ 

그러니까 하는 말 아니냐ㅋㅋ 여튼 절대 현혹되지 마소. 앙?

한 번씩 거침없을 때가 있는 S의 말은 어떤 의미에서든 밀려오는 회환을 쫓아내는 데 즉효일 때가 있었다. 나는 실없이 새어나오려 하는 웃음을 거두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이들이 떡볶이 국물이 흐르는 종이컵을 들고 몰려오기까지 십 분정도 남아 있었다. 대충 수업 준비를 해놓고 화장실에 가서 손을 한 번 더 씻을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용히 문이 열렸다. 중등부 담당의 M선생이었다.

"선생님, 오늘 퇴근하시고 뭐하세요? 이따 6시에 롯데리아 앞 광장에서 시위한대요."

네? 하고 나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M선생과는 정수기 앞이나 화장실에서 인사만 주고받는 사이었기 때문이다. M선생은 단순히 정보를 알려주려는 건지 아니면 같이 가자는 건지 의도를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일주일 전부터 학원 앞 사거리의 횡단보도와 가로등 곳곳에 현수막이 쳐져 있었고, 그 위로 #2차_우리동네촛불시위 #하야만이_살길 이라고 적혀 있는 걸 나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저녁엔 S와의 대화에서 충동적으로 일긴 했어도 에반게리온이든 뭐든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정성들여 쓰고 다듬은 뒤 블로그에 올리고 싶었다. 모처럼 만에 샘솟은 표현 욕구였기에 말을 걸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냈을 지 훤히 보이는 M선생의 움푹 패인 보조개를 바라보며 나는 중요한 영화 선약이 있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아 맞다. 선생님 전에 서울에서 영화 관련 일하셨다고 하셨죠? 원장 선생님한테 들은 적 있어요. 글도 많이 쓰셨다고... 멋지네요."

이렇게까지 말꼬리를 물며 늘어질 사람이 아닌데 나는 당황한 나머지 짧게 네 하고만 대답하고 멀뚱히 M선생을 쳐다보았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이 뜬금없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아유 다 옛날일 인걸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짤렸지만요 하고 넉살스레 대꾸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사적인 대화는 길게 하고 싶지 않다고 최대한 상냥한 웃음과 함께 완고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소용없었다. "저도 얼마 전에 모처럼 영화 한편 봤어요. 설리라고 선생님도 보셨어요? 역시 당연히 보셨겠죠... 근데 안 슬프셨어요? 저는 우리랑 막 비교가 돼서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적당한 대꾸로 말을 끊어놓지 않으면 M선생은 아예 나갈 기미가 없어 보였다. 슬슬 짜증이 났다. 수업 시작 1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눈치 없이 서서 쓸데없는 이야기나 늘어놓는다면 손을 씻을 시간도 교실 구석구석마다 여유 있게 세정제를 뿌릴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슬프지 않으셨어요? 라는 말에는 어쩐지 뼈가 담긴 것 같아 손톱 사이에 거스러미라도 일어난 것처럼 성가신 기분마저 들었다. 머리숱이 없어 휑하니 드러난 정수리와 파마 풀린 머리는 언제 봐도 푸석했지만 심지가 박힌 것 같은 눈빛은 흐릿하게 빛나고 있었다. Blow, blow blow away. 속내를 알 수 없는 J의 문자가 의중을 알 수 없는 M선생의 눈동자 위로 겹쳐졌다.

'자네 글은 섹시하지가 않아. 읽었을 때 잡아당기는 힘이 없단 말이지.'

국내외 영화제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던 홍보팀 과장은 번들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책 판매 때문에 취재원들에게 월권마저 용인한 편집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은 약간 미안하고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대체적으론 단호했고 당당했다. 자신들의 필요성에 적합하지 않고 경제적인 효용 가치가 없다면 언제든 가차 없이 밀려날 수 있다는, 죄책감이 없는 얼굴이었다. 가슴이 또 다시 옥죄여왔다. 조이는 느낌은 시나브로 익숙했다. 아니 아예 자발적으로 참아내고 있는 지경이었지만 나는 태연히 M선생을 향해 시크한 미소를 지었다. "감정적인 부분보다는 실화를 현대 미국 문맥 위에 재편성한 미장센이 깔끔해서 좋게 봤어요. 또 다른 버전의 웨스턴무비인 거 같아서 흥미롭기도 했구요. 뭐 감독이 트럼프를 찍을 지가 여전히 고민스럽긴 하지만요."

거기까지 말한 뒤 이제 그만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교실 문을 닫는 M선생의 옆모습을 곁눈질로 보며 생각했다. 그저 킬링타임으로 영화를 보거나 영화의 영자도 모른다면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든 정보와 지식은 물론이고 거기에 위트 넘치는 재치까지 적절히 가미된, 완벽한 문장 그야말로 완벽한 대답이었다. 어느 정도 심술궂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어쨌거나 나의 승리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모처럼 만에 흐뭇해진 기분으로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흐뭇함은 한 시간도 지속되지 못했고 나는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추악하고 끔찍하고 웃긴 대화의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겨울 만큼 당황스럽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나는 거의 영혼의 통증까지 느낄 지경이었지만 겉으론 티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입술에 힘을 주었다. 찜통에 삶아진 게처럼 벌게진 얼굴로 학원을 찾아온 학부모 둘에게 원장은 최 선생님 티칭 스타일이 엄해서 그렇지 이래 뵈도 서울에서 대학원까지 나온 재원이라고 부지런히 손과 허리를 움직이며 설명하고 있었다. 겉으론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내 편을 들고 있는 듯 했지만 다시 말하면 한껏 몸을 사리고 있는 태도와 다름없었다. 학부모 둘은 대관절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얼굴로 여전히 투덜거리고 있었다. 나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최대한 천천히 말했다. "공부 안 하고 하기 싫어하면 때로는 강경하게 이끌고 가주는 게 선생님 역할이죠. 주구장창 떠들게 놔두고 엎어져 자는 꼴을 계속 보고만 있을까요? 그게 진짜 어머님들이 바라는 거에요?" "아니, 그렇다고 애를 그렇게 기를 죽이고 망신 주고 윽박지르고... 우리 애가 선생님만 생각하면 무섭고 숨이 막혀서 글쎄 학원 계단만 쳐다봐도 다리가 떨린다잖아요."

한껏 호들갑을 떨며 격양된 목소리로 나를 모욕하려는 태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째서 어른이라는 것들이 그것도 부모라는 것들이 상대편 얘기는 듣지도 않고 자식 말만 믿을 수 있는지, 진짜 저 번들거리는 닭대가리 같은 머리통엔 저들의 논리가 진정 나보다 똑똑하고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나야말로 기가 막히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니 내가 원장 쌤 믿고 이 아파트 아줌마들을 얼마나 소개 시켜줬는데 이러면 안 돼지. 내가 이 말까진 안하려고 했는데... 우리 옆 집 애는 저 쌤 노처녀 히스테리가 아주 대-단하다고 합디다. 애들이 좀 떠들 수도 있지 입만 열면 그저 떠든다고 오만상 구박하고 또 혼자서는 어찌나 고상한 척 깔끔 떠는지 무슨 이상한 냄새나는 것만 맨날천날 칙칙 뿌려대고... 어쩌다 눈에 거슬리기라도 하면 두꺼운 자로 머리 콕콕 때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대잖아."

"이보세요, 그렇게 분간 없이 막말하면 무고죄로 잡혀가는 거 몰라요? 뉴스도 안 보세요? 그리고 솔직히 깨놓고 말해서 본인들도 별난 자기 자식들 감당 못해서 꾸역꾸역 학원 보내는 거 잖아요. 툭하면 상담이니 뭐니 귀찮게 전화해서는 집에서 아무리 얘기해봤자 씨알도 안 먹힌다, 선생님이 엄하게 가르치고 숙제도 많이 내달라고 사정사정해놓고는 이 무슨 앞뒤 안 맞는 거지같은 얘기에요? 그리고 공부하기 싫다는 애들, 그 대가리에 영어든 뭐든 억지로 시켜봤자 아무 소용없어요. 본인들도 학창시절에 공부해봤으니까 알거 아녜요,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공부 머리가 있는지 없는 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내 자식이 커서 남들처럼 번듯한 4년제 대학 들어가고 취직해서 사람구실하며 똑바로 잘 살 것 같죠? 천만에요. 시간 아깝고 돈 아까운 짓이니 차라리 실컷 놀리는 편이 백 번 나아요."

살기등등한 기세로 위아래로 훑어보는 학부모에게 나는 지독한 경멸의 표시로 대차게 쏘아붙였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목구멍에서 경련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미친 듯이 흥분하는 게 얼마나 병신 같은 일인지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높아진 언성에 기겁을 한 원장이 중간중간 내 말을 가로 막으려 손을 뻗어 팔꿈치 부근을 탁탁 쳐왔다. 그것이 나를 완전히 비참하고 모욕적으로 만들었다. 마치 밑바닥까지 몸이 패대기쳐지고 처참하게 짓뭉개진 기분이었다. 나는 원장 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왜요? 제가 틀린 말한 것도 아닌데 지금 뭐가 못마땅해서 이러세요? 애들 똑바로 가르쳐야 된다, 설렁설렁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 소문만 이상하게 퍼진다 하기 싫어하는 애들은 잘라내면 그만이라고 맨날 훈육 훈육 훈육 그놈의 훈육 타령을 몇 번이나 했잖아요. 원장 쌤 말씀대로 학원 방침대로 저는 학생들한테 훈육을 한 거구요. 멍청한 애들 사이에서 제가 얼마나 균형 잡아가며 일 한 건지 알기나 아세요? 그걸 알고 지금 제 팔을 이렇게 이렇게 막 붙잡고 쑤시는 거냐구요."

마지막에는 거의 발악하듯이 째질 듯한 목소리가 나왔고 종잇장처럼 구겨지던 원장의 얼굴이 완전히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흥분된 숨을 고르는 동안 학부모 둘은 코웃음을 치며 교실을 나갔다. 수군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경망스런 구두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 뒷모습에다 대고 네 년들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글을 내가 쓰는 사람이라고! 온 건물이 울리도록 쩌렁쩌렁하게 외치고 싶었다. 

노여움과 분노로 팽팽하게 달아올랐던 상담실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복사기가 돌아가는 묵직한 기계음만 썰렁한 적막 속에서 윙윙거리고 있었다. 원장은 세상의 온갖 근심을 혼자 다 짊어진 전사의 얼굴을 하고 의자에 앉아있었고 나는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어느 공간, 어느 한 사물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으면 잡생각들이 서서히 가라앉고 옅어지는 게 느껴졌었다. 분명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교실 문이든 시커먼 벽이든 바닥이든 몇 십 분씩 보고 있어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갈팡질팡해진 마음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던 문제를 또 다른 문제와 더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끌어낼 때가 많았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꼬리에 꼬리는 무는 생각은 직접적이고 생생한 감각으로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이 순간을 회상한다면 끔찍한 혐오감과 환멸에 몇 번이고 몸서리 칠 게 뻔했지만 이번에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물러설 수 없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와일드카드를 꺼내는 비장한 심정으로 말했다. "대한민국 헌법엔 모든 노동자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어요. 파업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오늘부터 파업에 들어갈 겁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원장은 똥물을 뒤집어쓴 표정으로 기가 막혀했다. 하지만 이내 질렸다는 얼굴로 절래절래 고개를 흔들더니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요. 파업이든 뭐든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하세요. 근데 선생님, 사람이 살다보면 가끔씩 미칠 순 있어요... 근데 미쳐도 곱게 미쳐야 돼요."  

시내 XX극장이라는 행선지를 듣자마자 택시기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지금 이 시국에 시위가 웬 말이냐며 노년의 기사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혀를 차며 핸들을 돌렸다. "그러게요. 세월호도 바다에서 일어난 교통사고고, 물대포 맞아 넘어진 할아버지도 업무상 일어난 사고고, 연설문이니 재단이니 하는 것들도 어느 정권에나 터질 수 있는 사곤데 사람들이 좀 과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죠." 넋 나간 사람처럼 기사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꾸하다가 아까 커다란 자로 아이들 머리를 콕콕 때렸다고 말한 학부모의 멱살이든 머리카락을 움켜잡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미친년이라고 낙인찍힌 몸이었는데 더 거칠게 나갔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을 것이다. 사건은 계속 터지기 마련이고 또 다른 사건으로 묻힐 텐데 그 속에 담긴 것들을 뭣 하러 들춰내느냐는 종교와도 같은 이곳의 맹신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어디서 대드느냐고 분노할 게 뻔한 이들의 야만적인 고성에 고상한 교양을 가장한 대꾸만으론 주도권을 가질 수 없었다. 독기 같은 통증이 가슴을 찔러와 가슴이 온통 갈기갈기 찢어지는 이 순간을 또 다시 무심한 마음으로 추억할 순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으로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죽도록 몸을 던져 깨지고 부딪치는 것 말고는 없었다. 억제할 수 없는 격정에 휩싸여 미친 듯이 학원 계단을 뛰어 내려오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택시를 잡을 때까지도 내내 그것만을 생각했다. 그것 말고는 더 생각이 나지 않았고 그 이외에 더 좋은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맞부딪침이 『데몰리션』이나 『파이트 클럽』에서처럼 고작 물건 분해나 집 부수기, 맨몸 혈투극 수준으로 끝나선 안 되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택시는 한 순간에 다른 세상으로 진입하듯이 빠른 속도로 지하차도 안으로 들어갔다. 바람을 가르는 스산한 소리와 그 스산함에 실려서 허깨비 같은 형태로 휘휘 날아다니며 지하차도를 밝히는 주황색 불빛이 창문 안으로 쏟아졌다. 나는 눈을 감고 기사 아저씨에게 말했다. 

뭐라구요 아가씨.

치욕스럽다구요.

뭐가 희한하다구요?

지나가는 자동차 소음과 날카로운 바람 소리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 나는 더 크게 말했다.

희한한 게 아니라 치욕스럽다구요. 

뭐가 그렇게 치욕스러운데요.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자고 하자니 왠지 쪽팔리고, 그렇다고 진짜 육교 앞에 내려서 시위에 참가하자니 마뜩한 용기도 없고, 그 속에서 뭔가 대찬 해프닝을 주도할 재간이나 박력도 당연히 없는데...  이제 와서 예술에 미치기엔 너무 속물처럼 살았고 그렇다고 다른 어디에 몰두하자니 마땅한 재주나 신명도 없고... 그냥 다 구질구질하고 치욕스러워서요. 근데 이 모든 감정을 치욕스럽다는 말 하나로 떼어내서 말할 수 있는 건지 이 마저도 잘 모르겠어서 치욕스럽다구요.  

눈꺼풀 위로 암흑 속의 장례식 횃불처럼 일렁거리는 주황색 불빛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나는 어젯밤 꿈을 생각했다. 그리고 거센 바람이 부는 해역 위로 한 몸처럼 엉켜드는 구름과 물의 모습을 상상했다. 잿빛 수면 위로 시리도록 새파란 파도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도 생각했다.  파도는 날카로운 사도의 이빨처럼 도로를 집어삼키고 건물을 무너뜨리고 산들을 끊어놓았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상에 있던 모든 것들은 터지고 무너지고 풀리고 흩어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핵폭탄이 터진 것처럼 세상은 불구덩이와 잿더미로 덮였고 땅은 으르렁거리며 흔들리고 갈라지기를 반복했다. 휘몰아치는 혼돈 속에, 파도가 솨아솨아 밀려왔다. 포스터물감을 그대로 쏟은 것 같은 새파란 파도가 발목을 휘감자 발가락부터 다리를 감싼 피부와 혈관이 유리처럼 깨지고 터지기 시작했다.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을 땐 뼈마디가 튕기고  심장이 터졌고, 코와 잇새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땅은 계속해서 흔들리고 갈라지며 거대한 협곡을 만들었고 파도는 사나운 괴물처럼 날뛰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미약하게나마 꿈틀거리는 세포와 그보다 더 작은 분자와 그보다 더 작은 원자와 그보다 더 작은 핵이, 아직 수평선 바깥으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존재들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한 방울의 피와 마지막 한 조각의 뼈가 완전히 다 사라질 때까지, 나는 『디 아워스』의 버지니아 울프처럼 어두운 모래 속에 발을 박고 고개를 들고 기다릴 것이다. 침수. 범람. 붕괴. 자폭 그리고 진멸. 흔들리고 넘실거리는 게 너무나 많은 이 세상이 먼지 한 톨 없이 완파되길 나는 간절히 바랐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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