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2월 둘째 주

▲ 충청일보 1970년 2월 11일자 1면.

[충청일보 신홍균기자] 1970년의 둘째 주에도 여야의 대립은 끝모르고 진행형이었다. 새해를 맞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충북도를 연두순시했으며 요즘 세대는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화전민 이주와 연탄재로 인한 하천 오염 등의 내용도 등장했다.


△1970년 2월 10일

1면 머리에는 '11日(일)에 與(여)·野(야) 總務會談(총무회담)' 제하의 기사가 자리하고 있다.

부제는 '共和(공화) 國會召集(국회소집) 先行要求(선행요구) 新民(신민) 先行條件(선행조건) 保障主張(보완주장)'이며 내용은 '共和(공화)·新民(신민) 兩黨(양당)은 11日(일) 上午(상오) 10時(시) 與(여)·野(야) 總務會談(총무회담)을 열고 年頭國會共同召集(연두국화공동소집)과 國會正常化(국회정상화)를 爲(위)한 與(여)·野(야) 協商(협상)을 벌인다'이다.

3면에는 '火魔奇襲(화마기습) 連續(연속)' 제하의 기사가 머리로 올라있다.

'화마의 악착스러운 발악이 곳곳에서 일어나 아까운 재산이 삽시간에 불타버리고 있다. 7일 밤에는 鎭川(진천)읍내 공보관에서 영화 상영 중 불이 일어났는가 하면 8일 밤에는 淸州시 남주동 가옥밀집가에서 9일 새벽에는 提川(제천)·검찰지청 및 지원에서 불이 일어나 양 청사가 몽땅 타버렸다'는 설명이다.


△1970년 2월 11일

이날 '朴大統領(박대통령) 來道(래도) 10日(일) 忠北道政(충북도정) 살펴' 제하의 기사가 1면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본문은 '朴正熙大統領(박정희대통령)은 10日(일) 上午(상오) 地方官(지방관)서에 對(대)한 年頭巡視(연두순시) 第(제)2日(일)째로 忠北道政(충북도정)을 視察(시찰)했다. 이날 朴大統領(박대통령)은 朴(박)경원內務(내무) 조始衡(시형)農林(농림) 李翰林建設長官(이한림건설장관) 그리고 金(김)정렴 秘書室長(비서실장)을 帶同(대동)하고 道政(도정)을 視察(시찰)했으며 丁海稙忠北知事(정해직충북지사)로부터 69연도 道政實績(도정실적)과 70연도 道政目標(도정목표) 및 重要施策(중요시책)을 보고받았다'는 내용이다.

3면의 머리는 '10일 고비로 解凍(해동)' 제하의 기사다.

'지난 8일부터 우리나라를 엄습한 늦추위는 10일 오후를 고비로 다시 풀릴 것 같다'는 성명이다.


△1970년 2월 12일

이날의 1면 머리는 '基本態度探索(기본태도탐색)으로 끝나' 제하의 기사다.

내용은 '國會正常化(국회정상화)를 爲(위)한 與(여)·野(야) 總務會談(총무회담)이 11日(일) 上午(상오) 10時(시) 國會議長室(국회의장실)에서 李(이)효상 議長(의장) 주재로 再開(재개)되었다. 共和黨(공화당)의 安保問題對策(안보문제대책)을 爲(위)한 단기國會召集要求(국회소집요구)와 新民黨(신민당)의 選擧制度(선거제도)개혁에 대한 사전보상 요구로 엇갈린 이날 總務會談(총무회담)은 與(여)·野(야)가 相對方(상대방)의 基本態度(기본태도)를 탐색하는 정도로 끝났다'이다.

地方版(지방판)인 2면 머리는 '莫大(막대)한 豫算(예산)만 浪費(낭비)'이다.

'정부와 단양군이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2리 산1~13번지 소백산 중턱 연하봉에다 화전민 집단이주 특설지구를 선정, 뽕나무를 심은지 2년이 된 현재 막대한 자금만 낭비하고 실효를 보지 못해 실패로 돌아갔다'는 설명이다.


△1970년 2월 13일

2면 地方版(지방판)엔 지금은 보기 힘든, 연탄재로 인한 하천 오염 기사가 자리하고 있다.

'河川(하천)에 汚物山積(오물산적)'이 제목이며 '겨울철을 맞아 제천중앙시장에 접해있는 하천이 인근 주변에서 쏟아져 나오는 연탄재로 메워지고 있으나 누구하나 거들떠보는 이 없이 방치되고 있다'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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