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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에게 있고, 황교안에게 없는 것은

기사승인 2020.02.09  13:5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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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수용 언론인(대전일보사 전대표이사· 발행인)

   
 

[신수용의 쓴소리칼럼] 신수용 언론인(대전일보사 전대표이사· 발행인)

아직은 평가하기 이르다지만, 황교안과 손학규에게 실망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시대도 읽지 못하고 메시지도 없다. 50,60년대나 있을 법한 정치 꼼수와 사욕을 보면서 실망은 더 그렇다. 그들은 노무현(이하 존칭생략)을 배워야한다. 꽃길을 마다하고 한국정치를 바꾸겠다고 ‘3김정치의 정글’로 떠났던 노무현의 생애를 읽어야한다.

필자는 지난 11대 국회 때부터 지금까지 정치, 사회,경제기사를 주로 써왔던 터라, 누가 정치 얘기를 하면 알아들을 정도는 된다. 그래서 노무현에게는 있고 그들에게는 없는 것을 찾아냈다. 운이 좋게 전에 있던 신문사에서 충청지역 정치부기자로 시작해 부장을 마치고, 서울로 파견되어 국회와 청와대 출입기자를 십 수 년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중에 노무현과 김대중, 김종필,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을 직접 만나 당돌하게 묻고 따지며 글을 쓰면서 관계를 쌓은 것은 그래서 행운이다. 뿐만 아니다. 이들 정부에서 일한 많은 인사들과 가진 인연도 큰 자산이자 큰 글감이다.

그 중에 1996년 9월 말, 노무현과 김원기(전국회의장)등 꼬마민주당 사람 여럿과 서울마포갈빗집에서 만났을 때다. 노무현과 김원기 등은 그해 4월 총선에서 낙선, 야인이었고 충청도는 JP(김종필)자민련은 56석을 얻어 3당으로 부상했던 해다. 5공청문회 때 TV로 봤던 노무현은 정말 감정에 꾸밈이 없었다. 밥상을 마주한 나에게 “썼던 칼럼 중에 링컨이 전시 중에 맥클린 장군의 막사로 가서 몇 시간을 기다렸으나 그가 침실로 올라가 돌아왔다는 인용을 봤습니다. 링컨이 관대하다고 썼던데, 나는 아닙니다. 링컨이 힘이 없고, 정권이 강력하지 못해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한참 뒤 그는 “작년(1995년)지방선거 때 그 신문에서 ‘자민련 핫바지 바람’선동했지요?, 또 정계 은퇴한 사람(김대중)을 특별 인터뷰해서 번복시킨게 그 신문이지요?. 대전에서 쪼매 판사를 해서 그 신문에 관심이 많은데 이렇게 대놓고 3김정치를 부활시켜도 됩니까?”하고 항의조였다. 나는 “우리 신문이 김대중씨 은퇴번복 단독 인터뷰로 특종한 것은 맞지만, 핫바지 오보는 우리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듣고 난 그는 “나는 나라가 정상대로 가려면 3김 정치문화 지역에서 끼리끼리 하는 패거리문화를 당장 청산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렇지요?”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날을 계기로 해수부장관 때나 이후 대선후보 경선, 대선후보 때 여러 차례 만나 사적인 얘기도 할 만큼 가까웠다. 아들 건호씨는 정치를 안 시킨다는 얘기나, 외손주들이 자식보다 더 이쁘더라는 얘기도 스스럼없이 했다.

2003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첫 기자회견 때 운 좋게 질문자로 내가 지정됐다. 나는 “대통령께서 방금 첫 조각을 발표했는데 충청권 신행정수도건설추진을 한다면서 책임자를 부총리 급으로 한다더니 약속을 왜 안지켰나? 그리고 지역편중해소 운운하더니 특정지역 출신만 국무위원을 집중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정찬용 인사수석을 돌아보더니 “탕평정책을 시도했으나, 소수점까지 맞출수 없었다. 행정수도는 제가 책임자이고 직접 챙기겠습니다. 신국장님”하며 관심을 가졌다.

얘기가 엇나갔지만 이렇게 그는 통상적인 업무까지도 나라를 멀리 봤다. 당장 욕을 먹었어도 그는 정치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2002년 대선 때는 ‘정치개혁은 낡은 정치청산뿐’이라고 외쳤다. 3김정치, 3김패권정치, 3김보스정치를 그대로 두선 한국정치의 미래가 없다고 외쳤다. 워낙 반응이 좋으니까 상대당후보도 이를 ‘고비용 저효율’로 공약했다.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씨 측은 크게 반발했다. 배은망덕하다느니, 구상유취(口尙乳臭)라느니하고 공격했다. 노무현의 답은 ‘뒷방에서 돈받고 전략공천하고, 흥정하는 낡은 정치를 그대로두란 말입니까. 반쪽 나라에서 영·호남 충청도 쪼개진 채 그냥 가자는 겁니까’하고 응수했다.

그래서 그는 달랐다. 1988년 4월, 제13대 총선에 김영삼의 제의로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 실세였던 민정당 허삼수 후보를 꺾고 당선된다. 노무현은 김영삼에게 ‘쎈놈과 붙게 해 달라’해서 허 씨와 붙었다는 얘기도 있다. 5공 청문회때, 증인인 정주영 현대회장을 다그친 대목은 유명하다. “그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군부에는 5년 동안에 34억 5천만 원이라는 돈을 널름널름 갖다 주면서 내 공장에서 내 돈 벌어 주려고 일하다가 죽었던 이 노동자에 대해서 4천만 원을 주느냐, 8천만 원을 주느냐를 가지고 그렇게 싸우나? 그게 인도적이냐? 그것이 기업이 할 일이냐? 답변하라!”라는 질의다. 급기야 전두환을 상대로 한 청문회중에 분을 참지 못하고 명패를 내던진 것도 국회사에 남아있다.

김영삼이 노태우, 김종필과 3당 합당을 하자 그는 ‘3당 합당은 밀실야합’, ‘권력흥정’이라며 거부했다. 그래서 남은 이들이 꼬마민주당을 만든다. 제14대 총선때 부산 동구에 출마했으나 재선에 실패하고, 이어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출마했지만, 떨어졌다. 또한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 출마했지만 이명박, 이종찬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이후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부영, 김부겸이 한나라당으로 떠났지만 쿠데타당이자 3당 합당의 원죄인 당에는 안가겠다고 정치소신을 지켰다.

이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에 공을 세운 뒤 이명박 의원이 1998년 초 선거법 위반으로 낙마한 종로보선에서 당선됐다. 그러나 2년 뒤 탄탄대로였던 꽃길을 마다하고 16대 총선에서 민주당의 험지를 택해 부산에 출마했다. 가족과 보좌진의 전부 반대했어도, ‘노무현의 정치는 이게 아니다’라며 험지를 택했다. 물론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에게 졌다. 그때 출마연설은 ‘다말려도, 아내가 말려도 지역주의를 깨기 위한 도전은 누군가의 노력은 계속되어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황교안과 손학규의 모습을 보면서 노무현정치가 떠오른다. 60여일 남은 4.15 총선에서 문재인 정부의 독주와 부딪힘을 외치는 안철수도 마찬가지다. 좁은 길, 외롭고, 힘들어도 나라와 국민을 생각한다면 내려놔야한다. 그리고 비워야한다. 모두가 고개를 도리질 치더라도 당파의 수장이라면 죽더라도 ‘험지(險地)에 내가 나가 싸우겠다’고 먼저 외쳐야했다. 그게 국민에게 감동이자 선물이다. 이제 정치를 막 시작하는 젊은 신예들에게만 험지, 적지로 보내 왜 창창한 미래를 기죽게 하느냔 말이다.

광화문에서 수백 번 집회를 열어 현 정권을 규탄하는 것 보다, 삭발하고 단식하는 행위보다도 수장이 험지에서 장렬히 싸우겠다고 진작부터 말했어야한다. 국민은 승패만 보는 게 아니다. 그가 나라를 이끌 리더인지, 아니면 자기욕심만 챙기고, 자기를 따르는 코드인물들만 발탁하는지 다 보고 있다. 자신의 앞날과 영달만을 위해 공천관리위 회의도 늦추고, 특정학맥과 전직 직장동료들만 챙겨지는 그런 야당당수는 필패이자 잠시 머물다가는 바람일 뿐이다.

황교안과 손학규와 안철수는 안되면 이해찬의 아성이자 보수의 험지인 세종에 나가겠다고 말했어야한다. 종로로 나간다는 황교안과 손학규, 그 아류는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수확도 없음을 명심해야한다, 제대로 된 장수가 되려면 노무현의 생애부터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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