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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고 치른 후에도 계속된 독립운동 … 자결로 일제에 항거

기사승인 2019.06.23  18:3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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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신현규 (申鉉圭·1889년~1928년)

1918년 대한광복회 가입해 활동
1920년 6월 징역 7년 선고 받아
석방된 후에도 다시 독립운동
신민부 군자금 모집 등 활약
1928년 8월 신문 받던 중 순국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신현규는 광복회와 신민부에 참여해 활동했고 끝내 자결로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다. 

그는 충북 괴산군 문광면 옥성리에서 태어났다. 20대까지는 농업에 종사했다고 전해진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탄으로 헌병경찰을 동원한 무단통치가 실시되자 이에 대항한 비밀결사투쟁이 지하에서 펼쳐졌다.

그 중 광복회는 1913년 경북 풍기에서 결성된 풍기광복단과 1915년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의 단원들이 주축이 돼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한 국내 비밀조직이었다. 

신현규는 1918년 경북 문경에서 광복회원인 손량윤(孫亮尹)을 만나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해 만주(滿洲)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해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했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해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열투쟁으로서의 총독 처단, 친일부호 처단 등을 추진했다. 

대한광복회는 1918년 주요인물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사형 순국함으로서 조직이 크게 와해됐는데, 신현규도 동지들과 피체돼 1920년 6월 징역 7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뒤에 다시 동지들과 독립운동에 매진해 군자금을 모집, 신민부(新民府)에 전달하는 활동을 벌였다.

신민부는 1925년 3월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를 주축으로 한 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통합을 추진, 결성된 단체였으며 기관지 '신민보'를 발행했다. 

그는 1927년 4월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좌진(金佐鎭)으로부터 일제고관과 친일분자의 주살, 주요시설의 폭파, 군자금 모집 등의 밀명을 받고 파견된 손호(孫滸)·이병묵(李丙默)과 손봉현(孫鳳鉉)·윤창선(尹昌善) 등과 함께 대구·경북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약을 하다가 밀고에 의해 1928년 7월 일경에 피체됐다.

1928년 8월 12일 신문을 받던 중 옥중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독립장은 후손을 찾지 못해 전수되지 못하다가 2018년 충북북부보훈지청에서 16년 만에 후손을 찾아 훈장을 전수했다.

배명식 기자 mooney7777@naver.com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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