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송병순 (宋秉珣·1839년 4월 10일~1912년 2월 4일)

 

대전 회덕 출신·송시열 9세손
동학군 봉기하자 향약 보급 
형 병선 순국에 구국활동 결심
1905년 11월 '토오적문'배포
1912년 일제 회유책 거절 후
유서 남기고 독약 먹고 순국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송병순은 충북 영동에 거주하며 후학을 양성하다가 일제의 침략에 항거해 1912년 자결 순국한 우국지사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재(心石齋).대전시 회덕(懷德) 출신.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으로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아우다.

송병순은 회덕 석남(현 대전 동구 성남동)에서 태어났으나 주된 활동은 본적인 충북 영동에서 이뤄졌다.

일찍이 고향인 회덕과 충북 옥천을 왕래하던 그는 1883년 영동군 학산면 활산으로 이주해 본격적으로 제자를 교육시켰다.

1865년(고종 2) 서원철훼령이 내려 만동묘가 헐리게 되자, 춘추대의 정신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훼손하지 말 것을 상소했다. 1888년(고종 25) 의정부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됐으나 응하지 않았다.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찾아오는 손님도 만나지 않는 등 칩거했다.

동학군이 봉기하자 향약을 보급하여 향인을 교화했다.

하지만 1895년 을미사변과 갑오개혁에 따른 단발령 선포 등 격변기의 혼란상이 극심해지자 자정(自靖)의 생활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데만 전념했다.

1903년 학행이 뛰어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아 고종이 홍문관서연관(弘文館書筵官)에 임명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1905년 형 송병선이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을 파기하기 위해 활동하다 순국했음을 듣고, 옳은 길을 지켜 죽을 때라고 "은산철벽에 불타 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옥(玉)이다"라며 구국활동을 결심했다.

그 해 11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의 유림에게 배포하며,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했다.

1906년에는 영동군 학산면 활산에 강당을 세우고 많은 문인들을 지도·계발해 천리를 밝히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정력을 기울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해 나라가 망하자(경술국치) 통분해 "나라를 위하는 충성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순국하는 길밖에 없다"하고 그 해 9월 5일 강당 위 서산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투신자살하려고 했다.

그 때 마침 문인 김용호(金龍浩)가 뒤에서 껴안아 실패하자, 그 뒤 두문불출하고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1912년 영동군 양산의 일본 헌병대가 소위 은사금(恩賜金)을 가져오자 이를 질책해 거절했다.

같은 해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에 임명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문충사.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을 통탄해하며 자결한 송병선(1836∼1905)과 송병순(1839∼1912) 형제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제사 드리는 사당이다.
▲ 학문삼요(권1). 조선 말기 학자 송병순이 학문에 필요한 글을 여러 문헌에서 발췌하여 엮은 책. 1907년에 간행됐다. 3권 1책.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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