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임시정부 100주년 특집-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김상태
▲ 민강

13. 김상태(金尙台·1864년~1912년 9월 21일)

전기·후기 의병 거쳐 
1911년까지 항쟁 지속
동학농민운동땐 지휘관
단양 순사 주재소 습격도
밀고로 붙잡혀 옥중 순절
강원 영월서 '추모문화제'

김상태는 1896년 전기의병에 참여한 이후 후기의병을 거쳐 경술국치 이후인 1911년까지 항쟁을 지속했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영춘을 떠나 삼척 김씨들의 본향인 강원도 영월의 옥동마을로 이주, 유년시절을 보내며 한학을 공부했다. 실력이 출중해 마을에 서당을 열어 학동을 지도하고 향교의 직임을 맡기도 했다. 
동학사상에 공감해 동학농민운동 당시 지휘관으로 관병에 대항했다. 
1896년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당시 전국도창의대장이던 이강년(李康秊)과 형제지의를 맺아 그의 중군대장으로 활약했다. 호좌수 유인석이 영월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 의진에 가담해 싸웠다. 유인석의 중군장이며 가장 신임 받던 제천 의병장 하사 안승우가 순절하자 유인석을 만주로 망명했다. 김상태는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을 따라가 섬기다가 3년 뒤 귀국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김상태도 이강년과 함께 제천, 단양 등지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7월 이강년은 40여진을 주천에 모아 회맹하고 도창의대장에 추대됐다. 이강년은 군대를 재편해 김상태를 중군, 백남규를 우선봉, 하한서를 좌선봉으로 삼았다. 
김상태는 이강년과 함께 순흥, 봉화, 풍기, 영춘, 영월 등지에서 활약했다.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되자 그의 군사지휘권을 인계 받아 단양 일대에서 의병을 지휘했다. 적의 세력이 강해지자 의병을 이끌고 소백산으로 들어가 계속 유격전을 전개했다. 일본 경찰, 헌병과 교전한 것이 무려 50여 회에 달했다. 1909년 3월에는 단양군내 순사 주재소를 습격해 순사 2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총독부는 김상태에서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고 돈에 눈이 먼 종사 우중수가 그를 밀고, 1911년 5월 순흥군 석천포(경북 풍기군 단산면)에서 체포돼 대구경찰서로 압송됐다. 1912년 3차에 걸린 신문 끝에 3년의 선고를 받자 의분을 참지 못해 순사의 칼을 빼어 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이날부터 단식을 하다가 단식 13일째인 1912년 7월 옥중에서 순절했다. 본인의 유언에 따라 이강년의 무덤 옆에 묻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현재 강원도 영월에서 '김상태 의병장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14. 민강(1883년 7월 26일~1931년 11월 4일)

대동단 참여·상해 임시정부
서울연통부 책임자로 활동
교포계·후세교육에도 힘써
본인이 경영하던 동화약방
연락거점 삼아 자금 조달
中서 일경에 재체포 후 순국

민강은 대동단(大同團)에 참여해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다.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서울연통부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상해에서 교민단의사회 학무위원으로서 교포계몽과 후세교육에도 힘을 썼다. 
민강은 충북 청원군 양촌리(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1909년 기울어가는 국운을 일으키기 위해 안희제, 김홍량, 신백우, 남형우 등 각계 인사 80여 명과 함께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조직하고 국권회복운동을 펼쳤다.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고 홍면희, 안상덕, 이규갑 등과 함께 한성임시정부의 성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추진했다. 그는 연락과 준비의 임무를 맡아 홍면희, 이규갑 등과 국민대회 취지서 및 임시정부의 약법 등을 작성해 준비를 진행시켰다. 
자신이 경영하던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을 연락거점으로 삼아 자금조달활동도 펼쳤다. 동화약방의 히트상품인 '활명수(현 부채표 까스 활명수)'를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 활명수는 1920년대 설렁탕 두 그릇 값인 50전에 팔렸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고자 서울시에서는 1995년 현재 동화약품 자리에 연통부 기념비를 세웠다.
민강은 이일로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같은 해 8월 보석으로 출옥했다. 
출옥 직후 전협, 최익환이 주도·조직한 대동단에 가입·활동했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울연통부의 책임자가 돼 동화약방을 대동단 및 연통본부의 연락거점으로 제공했다. 대동단이 일제의 소위 천장절인 같은 해 10월 31일을 기해 거행하려던 독립만세시위에 강매와 함께 서울의 7개 학생단체들의 동원책임을 맡고 이를 추진했다. 
이때 민강 등이 통솔한 학생청년단체는 연통단, 중앙단, 중앙청년단, 독립청년단, 불교중학학림 등이었다. 
만세시위가 예정보다 연기되는 과정에서 상해임시정부의 기밀문서를 목판으로 인쇄하다가 발각돼 체포됐다. 1921년 3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확정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1924년 1월 교민단의사회의 학무위원 등을 역임하며 활동했다. 1924년 3월 일경에 다시 체포돼 옥고를 치렀고 그 후유증으로 1931년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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