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사건의 과거·현재·미래] 1. 사건 전말과 역사적 의미

▲ 충북 영동 노근리 사건 현장인 쌍굴다리.

한국전쟁때 미군 총기 난사
피란민 수백명 쌍굴서 숨져
정은용씨 끈질긴 진상 규명
클린턴 미 대통령 유감표명

[영동=이능희 기자] 6·25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양민을 학살한 충북 영동 노근리 사건이 내년이면 70주년을 맞는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중에 발생한 가장 대표적인 민간인 희생 사건으로 꼽힌다. 전쟁의 아픔 넘어 노근리는 이제 대한민국의 평화공원에서 세계의 평화공원으로 나가고 있다. 본보는 노근리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노근리국제평화재단의 역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등을 3차례에 걸쳐 집중 보도한다.

충북 영동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5일 동안 북한군 공격에 밀려 후퇴하던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1950년 7월 26일 정오께 500∼600명의 피란민이 철로 위를 걸어서 노근리 경부선 철도 쌍굴다리 서쪽 100m 지점까지 접근했을 때 미군기가 피난민 대열에 공중폭격을 가해 수백 명의 무고한 양민이 희생당했다.

이 폭격에서 살아남은 피란민들이 노근리 철교 아래 쌍굴로 피신하자 미군들은 쌍굴 아래에 이들을 가두어 놓고 3박 4일 70여 시간 동안 쌍굴 양쪽에서 기관총 사격을 가해 250~300명이 사망했다.

이렇게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됐으나 전쟁 중에 일어난 우연한 사건, 또는 전쟁 중에 일어나는 일반적인 사건으로 세월과 함께 묻혀갔다.

그러나 노근리 사건을 통해 두 자식을 잃고 부인이 큰 부상을 입은 고 정은용 선생이 노근리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정은용 선생은 사건 발생 10년 후인 1960년 10월 피해자 수 명의 연명을 받아 미국 정부가 서울에서 운영하던 소청사무소에 노근리사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때 소청사무소는 법정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정은용 선생은 미국 정부에 끈질기게 법적 책임을 요구했다.

이와 함께 정은용 선생은 5·16 군사정권이 등장하면서 노근리 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는 어려움 속에서도 1994년 4월 노근리 실화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해 노근리 사건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했다.

그해 6월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본격적인 진상규명 활동을 전개했다.

정은용 선생의 아들 정구도 기획위원은 국제법 논문을 발표해 미국은 전쟁법과 국제 인도법을 위반한 것이므로 국가적 책임을 지기 위해 손해배상과 공식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노력으로 노근리 사건은 국내외 방송과 신문에 여러 차례 보도됐다가 1999년 말 AP통신에 의해 국제적인 사건으로 부각됐다.

1999년 10월 한·미 양국은 진상조사를 착수했다.

2001년 1월 12일 마침내 클린턴 미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 생존자와 한국 국민에게 유감 표명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후 2004년 2월 9일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이 만장일치로 국회를 통과했다.

이를 근거로 2004년 9월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위원회’ 등 관련 기구가 설치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희생자 심사와 노근리평화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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