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기 (郭在驥·1893년 2월 7일~1952년 1월 10일)

 

청주 출생… 대동청년당 가입
청남학교 재직시절 3·1운동 발생
시위운동 동참 후 중국 만주 망명
김원봉과 의기투합 의열단 조직

북경으로 가 암살 파괴활동 계획
폭탄 재료·권총 등 국내로 전달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실행 상의하다 체포돼 옥고
광복 후 귀국해 교육사업 종사도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携手)하야 부절(不絶)하는 폭력-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야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의열단 선언'(조선혁명 선언) 중에서 (1923. 1) -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곽재기 선생은 의열단 단원으로 조선총독부 등 일제 식민지 통치기관을 무력적 방법으로 파괴하려던 이른바 '밀양·진영 폭탄 반입사건'의 주도자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독립운동가다.

1893년 충북도 청주군 강외면 상봉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字)는 곽경(郭敬), 활동 중에 사용한 이름으로는 김광삼, 김재만 등이 있다.

한말 서울에 유학해 경신학교를 다녔다.

이때 대동청년당에 가입했고 이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보인다.

대동청년당은 신채호 등의 지도로 애국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국권회복운동 단체였는데 선생은 1909년부터 이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선생은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귀향해 청주 청남학교의 교사로 봉직하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다가 중국 만주로 망명한다.

선생이 밝힌 망명 시기와 동기는 "재작년(1919) 7월경에 중국 길림성으로 갔는데, 갈 때의 목적은 두 가지이니, 첫째는 조선 내지에 되도록 폭탄을 다수 수입할 일과, 둘째는 해외의 조선 독립운동의 상황을 시찰하고자 간 것"이었다.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민족독립을 선언하기도 하고,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독립을 청원하기도 하고, 또 독립만세를 고창해 독립을 갈구하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은 무기를 이용한 혈전(血戰), 즉 의열투쟁을 벌이지 못한 때문으로 인식한 것이다.

▲ 광복 이후 촬영한 의열단원들의 모습.

만주 길림으로 망명한 선생은 이곳에서 김원봉을 만나 서로 의기투합해 의열투쟁 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했다. 
13명의 의열단원은 창단 직후 '공약(公約) 10조'와 '5파괴(破壞)', '7가살(可殺)'이라는 행동목표를 지침으로 채택했다.

공약 10조는 첫째,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

둘째,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다.

셋째, 충의(忠義)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해야 단원이 된다.

넷째, 단(團)의 뜻을 우선하고 단원의 뜻을 실행하는데 속히 한다.

다섯째, 의백(義伯)한 사람을 선출해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의백이란 훌륭한 성품을 지닌 지도자이다.

여섯째, 언제 어디서든 매월 한 차례씩 상황을 보고한다.

일곱째, 언제 어디서든 모이도록 요청하면 꼭 응한다.

여덟째, 죽지 않고 살아 단의 뜻을 이루도록 한다.

아홉째, 한 사람은 다수를 위해, 다수는 한 사람을 위해 헌신한다.

열째, 단의 뜻에 배반한 자는 척살한다.

5파괴(破壞)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기타 왜적의 주요 기관이다.

반드시 제거해야할 대상 일곱가지 7가살(可殺)은, 1.조선총독부 총독이하 고관 2.일본군 주둔군의 수뇌들 3.대만 총독부의 총독과 고관 4.매국노 5.친일파의 거두들 6.적의 밀정 7.소작농을 착취했던 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 등이었다.

의열단은 본부를 북경으로 옮긴 후 대대적인 암살, 파괴활동을 계획하고 실천해 갔다.

이것이 바로 의열단의 제1차 대규모 암살, 파괴 활동이었고 여기에 앞장선 것이 바로 선생을 비롯한 김원봉과 이성우였다.

선생은 폭탄 13개를 만들 수 있는 화약과 그 부속품, 미국에서 만든 권총 두 자루, 탄환 100발을 국내로 전달했다.

선생은 이를 사용해 대규모 암살, 파괴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5월 13일쯤 중국 안동을 거쳐 경성으로 왔다.

경성으로 온 뒤 선생은 인사동에 유숙하며 여러 동지들과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실행을 상의하다가 6월 16일 일경에게 체포된다.

당시의 재판 과정을 보도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선생은 시종일관 흰 두루마기에 금테안경을 쓰고 항상 벙글벙글 웃으며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선생은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동지인 이성우와 함께 관련자 가운데 최고형인 징역 8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직후인 1930년 선생은 다시 국외로 망명해 만주, 상해, 노령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같은 해 11월 귀국했다.

귀국 후 선생은 정치운동에서 벗어나 '한국에스페란토어학회'를 운영하는 한편,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52년 1월 10일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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