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구(申錫九·1875년 5월 3일~1950년 10월 10일)

 

"나는 한일합병에 반대한다. 조선사람 치고는 누구나 다 한 가지 아니겠는가? 일본사람이 조선사람이 되어보면 또한 재판장이 지금 나의 처지가 되더라도 그러할 것이다. 독립사상은 합병당초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내 가슴속에서 사무쳐 있다." <신석구 선생의 공판기록 중 진술내용>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금관리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목사로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했고 이후 신사참배거부 등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적극적으로 항거했다. 

1919년 2월 27일 당시 기독교 남감리파 목사로 있던 그는 같은 남감리파 목사인 오화영(吳華英)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이 있음을 듣고 오화영·이승훈(李昇薰)·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최성모(崔聖模)·이필주(李弼柱)·함태영(咸台永)·김창준(金昌俊)·박동완(朴東完) 등 10명의 기독교인과 함께 이필주의 집에 모여 함태영이 최린(崔麟)으로부터 받아 온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회람하고 모두 그 취지에 찬성했다. 

이들 중 함태영만이 다른 연명자가 체포될 경우 그 가족보호의 임무를 맡기 위하여 제외되고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제출할 문서에 날인하기 위해 인장을 모두 함태영에게 맡겨서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케 했다. 

3월 1일 인사동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연행돼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됐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춘천·원산 등지에서 일본경찰에 여러 번 체포됐다

천안에서는 신사참배와 전승기원예배를 거부하다가 검거돼 복역 중 보석으로 석방됐다. 

광복 이후 선생은 북한지방에 남아 반공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3.1절 기념 방송 사건, 1947년 3월 기독교민주당 비밀결사 사건으로 2차례 투옥됐다.

1949년 4월 진남포에서 반공비밀결사를 영도했다는 죄목으로 북한 중앙정치보위부에 다시 피검돼 10년 형을 선고 받았다.

평양형무소에서 복역 중 국군의 평양탈환 직전인 1950년 10월 10일 공산군에 의해 총살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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